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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12/11 (15:12) from 221.156.203.182' of 221.156.203.182' Article Number :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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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미술의 선구자, 나혜석에서 천경자까지





한국미술의 선구자, 나혜석에서 천경자까지



이 구 열ㅣ 미술비평











1900년대 초 동경 여자미술학교는 여류예술가를 꿈꾸는 일본의

여학생들뿐만 아니라 식민지 조선의 여학생들이 꿈꾸던 학교였다. 실제로 광복을 맞이할 때까지 그곳에 유학했던 조선 여학생만도 100명이 훨씬 넘는다. 이들은 한결같이 그곳에서의 경험과

학업을 통해 우리 근대미술을 풍성하게 하는 데 큰 몫을 담당했다. 그 동안 한국 근대미술을 체계적으로 정리해왔던 필자의 글을 통해 나혜석, 백남순, 이숙종, 나상윤, 박래현, 천경자 등 오늘날 한국미술의 씨앗을 뿌린 여성작가들의 이름을 다시 불러 본다.









◀동경 여자미술학교 일본화과 수업장면



한국에서 여성이 남성과

대등한 교육 기회를 가지게 된 것은 1886년에 미국인 기독교 선교사(북감리교계) 스크랜턴(한국이름 이한성)이 최초의 여자학교인 이화학당(지금의

이화여자고등학교)을 서울에 설립한 데서 비롯되었다. 기독교 교육을 목표로 한 학교였으나 한글과 산수를 비롯한 여러 과목의 기본교육도 실시했던 것이다. 교육과목 중에는 찬송가 중심의 창가는 물론, 미국에서의 교육제도대로 그림 그리기와 도화도 포함되었던 것 같다. 그것이 우리 나라 학교 미술교육의 시초인 셈이다.



이화학당에 뒤이어 또 다른 미국인 기독교 선교사가 1887년과 1898년에 세운 정동여학당(1909년 정신여중으로 개칭. 북장로교계)과 배화학당(남감리교계), 그리고 1906년에는 고종의 계비인 엄비(嚴妃, 황태자 李垠의 생모)가 지원한 숙명여학교와 진명여학교의 설립 등, 여성 교육기관의 급속한 확산이 이루어졌다. 1906년에는 특히 대한제국

학부(교육부)에서 근대적인 학교인 보통학교, 중학교, 사범학교 등의

시행령을 새로이 제정 발표하며 도화, 습자, 수예 등의 미술과목을 필수로 포함시켰다. 1908년 4월에는 ‘고등여학교령’에 따라 관립 한성고등여학교가 설립되었는데, 그 시행규칙의 ‘도화’과목 교육방침은 “물체를 정밀히 관찰하여 정확하고 자유로이 그리는 능력을 기르게 하며, 의장(意匠)을 연습하여 미감(美感)을 배양케 한다. 도화는

자재화(自在畵, 연필이나 붓만으로 그리는 그림)로 하되 사생화를 주로 하고, 아울러 임화(臨畵)도 가르치고, 간혹 자기 의 생각대로 그리게 함이 좋다”고 규정하고 있었다. 학부에서는 《도화》교본을 간행하여 학생들에게 제공하였다.



그런 가운데 그림과 미술에 타고난 재질이 있는 학생이 드러났을 것이고, 그 중에는 전문 미술학교 출신의 일본인 화가가 서울에 와서 작품활동을 하는 것을 보며 미술학교 유학을 꿈꾸게 된 학생도 있었을

것은 당연하다. 1910년 2월에 서울의 일간신문 《대한민보》에 뉴스로 보도된 “일본 동경(도쿄)에 유학하던 이원자(李園子) 씨는 여자 수예과를 졸업하고 일작(엊그제) 귀국하였다더라”는 기사는 그 주인공이 서울에서는 어느 학교를 다녔는 지, 확인할 수 없으나 몇 년 전에

유학을 떠났던 것만은 확실함을 말해 준다. 그녀가 도쿄에서 수예를

전공한 데가 정확히 어느 학교였는지는 밝혀져 있지 않다. 1913년에

나혜석(羅蕙錫)이 양화를 전공하려고 일본으로 유학한 데 이어 많은

조선 여학생이 그림(유화·일본화)과 수예를 전공하려고 잇따라 유학을 갔던 도쿄의 여자미술학교(지금의 여자미술대학)의 1909∼1910년

졸업생 명부에는 이원자의 이름이 들어 있지 않다.



나혜석 〈화영전 작약〉 연도 미상

목판에 유채 34×23cm



그렇더라도 구한말 시기에 최초로 분명히 도쿄에 유학하여 수예를 전공하고 돌아왔음이 분명한 이원자는 어떤

집안의 딸이었을까? 또 그녀는 어떤

경위로 유학했던 것일까? 귀국 후 그녀는 어느 여학교의 수예 교사로 나갔을 것도 같으나 이 또한 조사 확인된

바가 없다.



1909년 7월에 서울에서 발간되던 일간신문들인 《대한매일신보》·《황성신문》·《대한민보》등에는 한국인 전문교사가 여름방학을 이용하여

도화 과목의 자생화와 창가를 특별히

더 배우고 싶은 학생을 상대로 개방적인 ‘음화(音畵, 음악·도화) 강습소’를 상동청년학원(남대문 근처.

상동교회가 부설했던 중등교육학원) 안에 개설하고 강습생을 모집한

광고가 실려 있다. 거기에 여학생도 꽤 있었을 것이나 상세한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그때의 지도교사는 평양 숭실중학 출신으로 한국 최초의 서양음악 교사이며 그림도 지도했던 김인식(金仁湜)이었다.



한편 관립 한성사범학교에서는 1906년에 도화 전문교사로 일본 동경미술학교 서양화과 출신의 고지마 겐자부로(五島元三郞)가 초빙돼 와서 도화 과목을 전담하고 있었다. 그 외에도 당시 서울에 와서 화가 생활을 하거나 일본인 거류민단의 중학교에서 도화 교사로 있던 역시

동경미술학교 출신의 일본화가 아마쿠사 신라이(天草神來)와 양화가

히요시 마모루(日吉 守) 등이 있었다.



그러던 중 일본에 국권을 피탈당한 직후인 1911년 1월에는 서울에 정착해 있던 또 다른 일본인 양화가 야마모토 바이가이(山本梅涯)가 ‘양화속습회(洋畵速習會)’라는 이름의 미술연구소를 지금의 을지로 5가 부근 오장동에 개설하고 신문광고로 남녀 학생을 모집하여 연필화·수채화·유화를 지도한 적이 있었다. 광고문에는 ‘부인·숙녀를

위한 특별강습’도 밝히고 있다.






여학생을 위한 유일한 전문 미술학교



1915년에는 조선사회의 저명한 서화가 김규진(金圭鎭)이 일찍부터 서울 소공동에서 운영하던 사진관 ‘천연당’의 신축건물 안에 서화연구회 강습소를 마련하고 남녀 연구생에게 각체 서법과 전통화법을 지도하였다. 3년 교육과정으로 개설한 이 연구회(소)의 운영은 오전을

여자반, 오후를 남자반으로 구분하고 있었다. 1918년 6월에 제1회 졸업생을 정식으로 배출하였는데, 거기에 여학생도 있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남성으로는 그 뒤로 뚜렷하게 서예와 문인화 활동을 한 이병직(松隱 李秉直)이 그때의 첫 졸업생이었다.


도쿄의 여자미술학교는 일본에서도 여학생들만의 유일한 전문 미술학교였다. 한국에 비해 수십 년 앞서 서양의 선진 문물제도와 근대적

국가경영 체제를 도입하여 정착시킨 일본은 교육제도에서도 서양을

본받은 각종 전문학교와 대학교를 사립·공립·국립 등으로 세워 국가 발전에 필요한 모든 분야의 새 세대 전문인력을 양성·배출하고

있었다. 여자미술학교도 그런 노력 중의 하나였다.



1900년에 한 귀족 부인이 설립한 이 여자미술학교는 처음에는 2년제

보통과로 일본화·재봉·자수의 세 전공과만을 두었다가 이내 고등과를 병설하고 전공과도 서양화·편물·조화(造花) 등으로 확대시켜갔다. 1902년부터 해마다 졸업생을 배출하여 나혜석이 입학한 1913년 봄에는 그 수가 1000명을 넘었다. 1929년에는 여자미술전문학교로 개칭했다가 태평양전쟁 이후에는 대학으로 승격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08년 재봉과 보통과 졸업생 명단에 들어 있는 ‘장진혜(張晉慧)’라는 이름이 한국학생이었는지, 또는 중국학생이었는지 확인해 볼 만하다.



어떻든 도쿄의 여자미술학교는 미술가나 미술교사 또는 그 분야에서

어떤 전문활동을 하고 싶던 조선 여학생들에게도 동경할 만한 학교였다. 실제로 광복 직전까지 일제 식민지시대에 그렇게 유학한 조선 여학생은 100명 이상이었음을 그 학교 졸업생 명단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 유학생의 대부분은 역시 전통적 여성미술 분야인 자수를 비롯하여 재봉·편물·조화 등을 전공하려고 한 것이었으나 양화나 일본화를 전공한 학생도 약 20명 있었다. 유학을 떠났다가 여러 사정으로

중도에 자퇴한 학생도 적지 않았다. 다음은 그 여성 유학생 중에 작품업적이 두드러지거나 근대·현대 한국미술 발전에 뚜렷이 기여한 대표적인 여성을 정리해 본 것이다.



우선 나혜석(1896∼1948)이 도쿄의 여자미술학교로 서양화(유화)를

전공하기 위해 유학을 떠난 것은 이미 말했듯이 1913년의 일이었다.

4월에 서울의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직후였다. 당시에는 조선에 전문 미술학교가 없었으므로 남학생이건 여학생이건 전문교육을 받아 새 시대의 양화가나 동양화가 또는 자수미술가가 되기 위해서는 그러한 일본 유학이 긴요했다. 나혜석은 그런 유학이 가능했던

수원의 부유한 집안의 딸이었다. 이미 도쿄 고등공업학교에 유학하고

있던 오빠 나경석(羅景錫)이 혜석의 타고난 그림 재능을 갈파하고 한국 최초의 여성 양화가를 만들려고 도쿄로 데리고 가서 여자미술학교

양화과에 입학시켰던 것이다. 중간에 사정으로 한때 휴학한 뒤 복학하여 1918년 양화과 고등사범과를 졸업하고 서울로 돌아온 나혜석은

1921년 3월 19, 20일에 매일신보사 구내의 내청각(來靑閣)에서 조선인 양화가로서는 처음으로 유화개인전을 가짐으로써 미술계에 화려하게 진출했다. 그녀는 동경미술학교 서양화과에 유학한 고희동(高羲東)·김관호(金觀鎬)·김찬영(金瓚永)에 뒤이은 조선의 네 번째 양화가이면서 학교는 다르나 역시 일본에 유학하여 유화를 전공한 최초의

여성이라는 점에서 역사적 평가를 받을 만 하다. 그녀는 문필 재능도

특출하여 신문·잡지에 조선여성의 인권과 해방 문제를 대담하게 거론한 글을 많이 기고하여 사회적 주목을 받았으며 물의도 일으켰다.



1921년 4월에 열린 민족사회 미술가들의 서화협회 첫 회원작품 전람회에서도 나혜석은 홍일점 출품자였다. 고희동과 더불어 유화를 출품한 단 두 명 가운데의 여성이어서 신문의 화제 기사가 되기도 하였다.

그녀는 1922년부터 서울에서 개최된 조선미술전람회 서양화부에도

해마다 활달한 필치의 유화, 주로 풍경화를 출품하여 입선과 입상 및

특선을 거듭했다. 1927년에는 일본 외무성 소속의 만주 안동현 부영사였던 남편 김우영(金雨英)과 함께 약 2년간의 세계일주 여행을 떠나

파리에서 약 8개월을 머무르며 야수파와 표현주의의 영향을 받기도

했다. 이처럼 행운을 누리던 나혜석은 여행중에 파리에서 만난 최린(崔麟, 당시 천도교 지도자)과의 불미스러운 일로 귀국 직후 남편에게서 이혼을 강요당한 끝에 비극적으로 파멸해 갔지만, 그녀의 유화작품 업적과 선구적 여권 주장 등의 진취적 사회활동기록 등은 역사에

뚜렷이 빛난다.



나혜석에 뒤이은 두 번째 여자미술학교 유학생은 자수와 일본화를 전공한 장선희(張善禧)였고 백남순(白南舜)·이숙종(李淑鍾)·김명화(金明華) 등이 그 뒤를 따랐다.



장선희(1897∼?)는 황해도 재령에서 태어나 1917년에 서울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지금의 경기여고) 기예과(技藝科)를 졸업한 뒤 1921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여자미술학교 자수과 선과(選科) 2학년에 편입하여 1924년에 졸업하고, 다시 일본화과 선과에 편입하여 1925년 3월에 졸업하였다. 그녀는 다분히 일본풍의 자수활동을 했지만 많은 제자를 기르며 현대적 한국 자수미술의 발전에 기여했다. 광복 후인

1949년 제1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약칭 국전) 때부터 공예부 추천작가·초대작가 및 심사위원을 역임했다.



백남순(1904∼1994)은 서울 태생으로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와 제일고등여학교를 거쳐 1923년 4월에 이숙종·김명화와 함께 도쿄의 여자미술학교 양화과에 입학했다. 그러나 1학년을 다니고 나서 사정으로 자퇴한 뒤, 서울 약현성당(지금의 중림동성당) 부설 가명보통학교

교사로 나가며 연례 조선미술전람회에 풍경과 정물을 그린 유화를 출품하여 거듭 입선했다. 1928년에는 프랑스인 신부의 도움으로 파리로

유학을 떠나 약 2년간 체류하며 새로이 그림 수업을 하여 여러 살롱에

입선하기도 했다. 파리에서 만나 결혼한 미국 예일대학 출신의 화가

임용련(任用璉)과 1930년에 귀국해서 부부작품전을 가진 뒤 민족적

성격의 서화협회전람회와 서울의 조선인양화가단체 ‘목일회(牧日會, 뒤에 牧時會로 개칭)’ 동인전에 부부화가로 가담하는 등 활발하게 작품활동을 했다.



그러다가 임용련이 평안북도 정주의 오산중학 미술 및 영어 교사로

부임하여 따라갔다가 광복 직후 서울로 내려왔다. 임용련이 6·25전쟁 당시 공산당 조직에 잡혀가 생사불명이 된 후 백남순은 자녀들을

데리고 미국으로 이주했다.



이숙종(1904∼1985)도 서울 태생으로 백남순과 숙명여고 동창이었다. 여자미술학교에도 같이 유학했던 것 같다. 백남순은 이미 말한 대로 1년 후 중퇴했으나 이숙종은 1926년 3월에 양화과 고등과를 졸업했고, 이어서 동경제국대학 문학부 미학과에 들어갔다가 귀국했다.

조선미술전람회에 수차 유화를 출품하기도 하고, 여러 여학교에 교사로 나가다가 육영사업에 뜻을 두게 된 그녀는 1936년에 독자적으로

성신여학교를 설립하고 1982년에 대학으로 발전시키면서 교육가로

큰 업적을 남겼다.


김명화(1903∼?)는 경기도 고양군 용강에서 태어나 경성공립고등여학교를 거쳐 1923년 4월에 백남순·이숙종과 함께 도쿄의 여자미술학교로 유학을 떠났고, 1927년 3월에 서양화과 고등사범과를 졸업하였다. 작품활동으로는 1928년 제7회 조선미술전람회 서양화부에 유화 〈조선옷을 입은 여인〉이 한 번 입선한 것 외에 알려진 기록이 없다.



현재 생존하고 있는 나상윤(羅祥允, 1906∼)은 함경남도 홍원 출생으로 함흥에서 여학교를 다닌 후 1925년 4월에 일본으로 가서 여자미술학교 서양화과 선과에 입학했다. 그러나 1927년 9월에 자퇴하고 다음해 동경미술학교 서양화과 출신인 동향의 도상봉(都相鳳)과 결혼하여

서울로 와서 정착했다. 작품은 1930년 제9회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한 유화 〈동경제국대학 구내 풍경〉(현존) 정도가 알려져 있다.






한국화단의 신예로 자리잡은 유학생들



천경자 〈노부(老婦)〉 종이에

수묵채색 118×146cm 1943




1930년대에는 더 많은 조선 여학생이 도쿄의 여자미술학교(1929년에 미술전문학교로 개칭)로 유학을 떠났다.



1931년 4월에 여자미술학교 사범과 자수부에 입학하여 1934년 3월에 졸업한 박여옥(朴呂玉, 1911∼ )은 장선희에 뒤이은 자수미술가로 많은 활동을 했다. 충청남도 예산 태생으로 서울에서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를 나와 미술학교로 유학을 한 그녀는 조선미술전람회와 광복 후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서 거듭 입선했고, 제자를 많이 배출하기도 했다. 그녀의 후배로 1937년 4월에 같은 사범과

자수부를 졸업한 경기도 개성 태생의 박을복(朴乙福, 1915∼)도 조선미술전람회와 광복 후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서 입선을 거듭하는 등의 작품활동 외에 많은 제자를 길러 현대 한국자수미술의 발전에 공헌하였다.



유화 전공자로는 1938년에 고등과 양화부에 입학하여 1941년에 졸업한 강원도 평강 태생의 정온녀(鄭溫女, 1917∼북한에 생존?)가 있었다. 서울에서 경성여자사범학교 강습과를 졸업하고 도쿄로 가서 여자미술전문학교에 유학중이던 1940년에 조선미술전람회에 한번 유화가 입선한 적이 있으나 1943년에 니혼대학(日本大學) 예술학원 미술부를 졸업하고 돌아온 뒤의 작품활동은 별로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1948년 1월에 서울 화신백화점 화랑에서 유화개인전을 가진 바 있고, 1949년 7월에는 한국화가 이현옥·배정례·박래현과의 여류 5인전(천경자 불참)에 참가했다. 그리고 다음해에 일어난 6·25전쟁 직후 서울을 점거했던 북한체제에 협력하다가 9·28 서울 수복 때 월북하였다.



앞의 5인전의 이현옥(李賢玉, 1909∼2001)은 서울에서 이상범(靑田

李象範)에게 사사한 후 한때 중국에 가서 그림 수업을 했고, 배정례(裵貞禮, 1916∼)는 1930년대 후반에 니혼미술학교 일본화과에 입학했다가 중퇴하고 서울에서 김은호(以堂 金殷鎬)에게 사사하여 화단에

진출했다. 박래현(朴崍賢, 1920∼1976)과 천경자(千鏡子, 1924∼)는

정온녀의 여자미술전문학교 동문후배다.



박래현은 평안남도 남포에서 출생했으나 가족이 이사해 간 전라북도

군산에서 성장하며 전주여자고등보통학교와 서울의 경성관립여자사범학교 연습과를 졸업하고 일본 유학을 떠나 1940년에 여자미술전문학교 사범과 일본화부에 입학, 1943년 9월에 졸업하였다. 그 졸업 직전인 5월에는 서울의 조선미술전람회 동양화부에 응모했던 소녀상의

채색화 〈화장〉이 특선에 오르며 각광을 받았고 다음해에는 풍경화

〈산길〉이 입선하며 전통화단의 여성 신예로 부각되었다.



1946년 김기창과 결혼한 박래현은 연속적인 부부전람회로 화제를 낳으면서 특출한 재능을 나타냈다. 그러던 가운데 1956년에는 현대적

화면구성의 거리 풍경 〈노점〉이 국전(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서 대통령상을 받았고, 그 뒤의 작품 활약은 더욱 두드러지게 이어졌다.



천경자는 전라남도 고흥에서 태어나 광주에서 고등여학교를 나오고

1941년에 도쿄로 가서 여자미술전문학교 고등과 일본화부에 입학했고 1943년 9월에 졸업하고 돌아왔다. 박래현과 졸업동기생이었으나

나이는 네 살 밑이었고, 다 같은 일본화 전공이었으나 공부한 데는 사범과와 고등과로 서로 달랐다.



천경자도 조선미술전람회에서의 입선(1942∼43)을 통해 전통화단에

데뷔했고, 광복 직후에는 개인전을 거듭하며 작품역량을 드러냈다.

1955년에는 신선한 채색표현의 소녀상 작품 〈정(靜)〉이 국전에서

박래현에 앞서 대통령상을 받기도 했다. 이와 같은 그녀의 찬란한 작품활동은 박래현과 줄곧 쌍벽관계를 이루었다. ■



(자료출처: 2003년 월간미술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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